사물의 이치/경제학산책

경제모형과 가정

J I Yoon 2012. 12. 17. 13:15

 

모든 과학이 그러하듯이 경제학이론도 가정(assumption)과 가설(hypothesis)로 이루어져 있다. 가정이란 가설을 세우기 위한 기초작업으로 가정은 적을수록 좋다. 하지만 가정이 없는 가설이란 생각하기 힘든데 학문연구에서 가정은 불가피한 것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한편 가설이란 분석의 결과로부터 얻게 되는 명제를 말한다. 그리고 가정과 가설로 이루어진 것을 모형(model)이라 부른다.

중고등학교 때 배웠던 물리학의 기초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었다. 어떤 물체가 있는데 이 물체의 질량은 m이다. 아무런 힘이 가해지지 않으면 이 물체는 정지해 있게 되는데 그렇다면 이 물체의 속도는 0이다. 이제 이 물체에 F의 힘이 가해진다. 그렇다면 이 물체는 힘이 가해진 방향으로 a의 속도로 움직이게 된다. 만약 이 물체의 운동방향과 같은 방향으로 또 다시 F의 힘이 가해지면 이 물체의 속도는 a+a=2a가 된다. 또한 속도가 2a일 때 반대방향으로 F의 힘이 가해지면 이 물체의 속도는 2a-a=a가 된다. 이를 공식화한 것이 유명한 F=mⅹa이었다.

이 설명에서 가설은 질량이 m인 물체에 F라는 힘이 가해지면 a라는 일정한 속도로 그리고 같은 방향으로 영원히 움직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심각한 의문을 갖고 있었다. m이라는 질량을 가진 물체에 힘을 가하면 그 물체는 일정한 속도로 그리고 같은 방향으로 영원히 움직이게 될까? 아마도 그런 현상을 실제로 관찰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최초의 속도가 a일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속도가 줄어들고 언젠가는 정지하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유도 어렵지는 않다. 이 물체에는 마찰(friction)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F=mⅹa는 틀린 이론인가? 조금 더 심하게 말하면 뉴튼의 제2법칙은 엉터리인가?

이 의문은 오해였음이 분명한데 그 이유는 이 모형에 가정이 있음을 간과한 것이다. F=mⅹa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가정이 있었다. 예를 들면 마찰이 없다든지 하는 것 말이다.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일상생활에서는 비현실적인 가정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들이 충족된다면 질량이 m인 물체에 F라는 힘이 가해질 때 a라는 일정한 속도로 그리고 같은 방향으로 영원히 움직인다는 가설을 실제로 입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달에서 실험하면 그렇다고 한다.

왜 이런 예를 드는가라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다음의 질문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비현실적인 가정으로부터 도출된 F=mⅹa라는 가설은 현실을 설명하는데 쓸모있을까? 마찰이 실제로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현실에 부합하지도 않는 가정하에 도출된 가설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이렇게 생각하고 물리학책을 덮어버리면 더 이상 물리학을 배울 수 없다. 우리가 흔히 범하는 일상적인 잘못이다.

물리학자들이 하는 일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우선 특정의 가정하에 F=mⅹa를 도출한다. 물론 물리학자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가정을 완화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마찰이 없다는 가정을 완화하여 마찰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마찰력을 계산하는 공식을 찾아낼 것이고 이를 F=mⅹa에 반영할 것이다. 훨씬 더 복잡한 형태가 되겠지만 실제에 가까운 응용가설을 얻게 된다.

이런 점에서는 경제학도 물리학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가장 먼저 비현실적일지도 모르는 가정에 근거하여 기초이론을 세운다. 그 다음에는 비현실적인 가정을 완화함으로써 보다 더 실제 세계에 가까운, 그러나 복잡한 모형을 얻으려 한다.

경제학을 많이 공부하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 있다. 경제학원론이 얼마나 훌륭한 가설들로 이루어져 있는가를현실에 가까워지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경제학원론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것으로 부족하다면 경제학을 더 많이 공부하면 된다. 하지만 경제학원론에서 시작하지 않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